17. 12. 3.

LABYRINTH - [모르모트]


(찜찜하지만, 잠시 뒤로 돌아가야겠다)

"헉, 허억. 헉."

도망치듯 달려나간 통로 앞에는 언제나 그렇듯 하얀 방이 있었다. 하지만 차이가 좀 있다면.

"실험실?"



어딘가의 동력실 같기도, 실험실 같기도 한 곳이었다. 거대한 기계나 실험용 시약들, 그리고 시퍼런 액체 속에 담긴 이름 모를 생물들이 나를 반겼다.

무수한 회로와 파이프들이 무기질적으로 이어져 벽의 어딘가로 통한다. 혈관처럼 맥동하며 새파란 관에 물을 공급하거나, 전기를 공급하겠지.

실험실이라. 주변 풍경을 둘러보자니 새삼 내 처지를 상기했다. 실험실에 갇힌 모르모트.


이곳이 어딘지도, 왜 여기에 있는지도 모른다. 그저 누군가의 목적에 의해, 가라는 대로 가며 살라는 대로 살다가 죽는. 그런 모르모트.


"하. 하하."

씁쓸한 마음에 헛웃음을 흘렸다. 뒤에서 따라오던 연구원 여자... 편의상 C라고 부르기로 한 그녀는 잠시 의문스런 탄성을 흘렸지만, 별 말 않고 넘어갔다.
마구잡이로 어질러진                                                           
                                                                                                      
                                                                      비커,                                                      시험관,
                             뭔지 모를 고기조각,                                         
플라스크,
                                                                                                    인큐베이터,                        전자 장치,
를 피해 갔다.

"큭."

전자장치를 넘어 오다가, 나는 발목의 옷깃이 걸려 그대로 넘어지고 말았다. 신경질적으로 발을 빼내자.

찌지직. 옷깃이 시원하게 찢겨져 나갔다.

"크, 제길."

욕을 주워섬긴 나는 찢어진 옷깃을 아무 데나 버려둔 뒤, 다시 걸음을 재촉했다.
나는 곧 실험실의 끝자락에 닿았다.

"이봐. C."
"응?"

내 물음에 연구원C는 대답했다. 나는 그녀를 흘겨보며 말했다.

"여기는 끝까지 이런 식인가?"
"이런 식은 어떤 식이지?"
"계속 썩을 하얀 방이 줄창 나오고, 나는 문을 선택해 나가고?"
"그건 여기까지."
"대체 이건 뭘 위한 방들이지?"
"글쎄, 말하자면 시험단계 같은 거지."
"그럼 그 다음은?"
"가 보면 알지 않겠어?"
"빌어먹을년 같으니."
"흐흐."

중요한 것만큼은 절대 말해주지 않는다. 저럴 때마다 나는 내가 실험용 쥐라는 사실을 새삼 실감하곤 한다.

"흐음."

나는 다시금 두 문앞에서 고민에 빠졌다.

왼쪽과
                                                                                                                                                      오른쪽.

나는 이번에도 별 고민없이, 오른쪽 문을 선택했다. 그 전에 왼쪽으로 들어왔으니 이번엔 반대다. 그런 단순한 이유였는데.

"... 또.
            거기로,
                        가려고?"
"... 또?"

유난히 흐릿하게 들려온 C의 말.
나는 문을 열기 직전, 그녀를 쳐다봤다. 그녀는 가늠하기 힘든 표정으로, 가만히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턱,

그녀가 들고 있던 차트와 패드를 덮었다. 글쎄. 기분탓일까.
그 덮는 소리가 유난히 섬짓하게 들려온 것은.

"이번 실험체, 싹수가 있어 보여요. C 스타팅으로 다시 시작해주세요."

그 뒤에 천장을 향해 내뱉은 영문모를 소리가 유난히 거슬렸던 것은.

"... 흥."

나는 잠시 그녀를 쏘아본 뒤, 발걸음을 재촉했다.


스토리텔러: 이웅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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