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11. 14.

LABYRINTH - [단말마의 기억]

(불안한 마음이 든다. 잠시 돌아가야겠다)


"이건, 또 뭐야."

나는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황당함을 느껴야 했다. 눈앞에 펼쳐진 지도 때문이었다.



조잡하게 그려진 지도다. 이것도 홀로그램인지 뭐시기인지, 어쨌든 허공에 떠 있다.
클릭하면 확대되는 구조인 것 같다.

"흠."

대충 파악하기로는 지금까지 지나온 곳을 표시해놓는 지도 같았다. 어린애가 발가락으로 그려도 저거 보단 잘 그리겠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지도를 훑었다.

문득 상기의 문구가 눈에 띄었다. 프로젝트 레이비린스. 생소한 단어였지만, 눈에 익었다. 이 기묘하고 소름 끼치는 감각. 나는 머릿속을 헤집는 생소한 지식에 몸서리쳤다.

"내가 그린 건데, 어때? 알기 쉽지?"

문득 뒤에서 지긋지긋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좀 자랑스러워하는 목소리다. 고개를 돌리자, 어느새 멀찍이 옆에 서 있는 연구원 여자가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진저리치며 그녀에게 물었다.

"언제 쫓아왔지?"
"무슨 말을? 난 처음부터 여기에 있었는데."

그렇게 말하더니 갑자기 그녀의 모습이 사라진다. 허물어진 형상이 치지직, 하는 짧은 잡음과 함께 내 코앞에서 다시 뭉쳐져 간다. 하얀 가운을 펄럭이며 모습을 나타낸 여자는 내게 얼굴을 디밀며 말했다.

"저쪽 방의 내가 먼저였을까, 아님 지금 내가 먼저였을까?"
"크윽, 씨발. 저리 꺼져."

이 빌어먹을 여자는 쇼맨십도 있는 듯하다. 나는 앞에 가만히 서 있는 여자에게 가운데 손가락을 들어 까딱여 보였다.

"어?"

여자의 반응은, 제법 큼지막했다.
갑자기 얼굴이 조금 굳더니, 가운데 손가락을 들어올린 나를 빤히 노려본다. 화가 난 것인가. 아무래도 입장이 입장이다 보니 마른 침을 한 덩이 삼키고 있자니.

"실험체 7413. 그 손짓이 무슨 의미인지 알아?"

나는 그 의미심장한 물음에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가운데 손가락. 내 기분 나쁜 지식들이 말해주길, 때려 죽이고 싶은 사람에게 보여주면 좋은 제스쳐라고 했다.

"흐음."

연구원 여자는 그렇게 길게 숨을 쉬나 싶더니 들고 있던 태블릿에 시선을 던졌다. 몇 줄 끼적이고는 다시 고개를 든다. 기분탓일까. 전보다 눈빛이 가라앉은 느낌이었다.

"뭐, 알겠다. 다음 방으로 진행하도록 해."
"조까. 말 안 해도 갈 생각이니...."

... 까지 말하고 나는 말을 멈췄다. 눈앞에 다다른 새하얀 벽.
나를 반기는 문은 두 개였다. 심지어 이번엔 색의 차이도 없는, 그저 하얗고 하양 일색의 문이.
왼쪽과,
오른쪽.

각각 하나씩 붙어있다.

나는 연구원 여자를 한 번 쏘아보고는, 지도를 가리켰다. 연구원은 잠시 내 행동을 살피더니, 곧 해석을 마쳤는지 대답을 했다.

"앞으로 가는 길은 하나야. 내가 말해줄 건 그거 밖에 없네."

그리고 나는 그 때 확신했다. 이 여자는 확실히 전보다 차가워졌다. 왜일까. 하긴 대놓고 욕을 먹고도 차가워지지 않으면 그게 더 이상한 걸지도 모른다. 어차피 더 이상 얻어낼 정보도 없는 것 같고, 신경쓸 이유는 없으리라.
가는 길은 하나다. 이 말을 어떻게 받아들이면 좋은가. 그렇다면 나머지 하나는?

죽음?

문득 가슴을 쓸어내리는 서늘한 단어 하나.
순간 움직임이 멎었던 나지만. 곧 스멀스멀 기어드는 불안을 떨쳐냈다. 어차피 아무런 단서도 없는 마당에, 주저해야 무얼 하겠는가.

"그럼...!"

나는 아무런 생각 없이, 오른쪽 문의 손잡이를 잡았고.

"끄... 악!"


"컥, 허억. 허억...!"

숨을 몰아쉬며 생각했다. 환상? 아니, 기억인가? 이 치가 떨리는 현실감. 이게 정말 환상이었나? 그 소름 끼치는 단말마가?

"왜 그러지, 7413?"

문득 서릿발처럼 차가운 연구원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나는 이마를 타고 흐르는 식은땀을 훔쳐내고, 여자를 쳐다봤다.
여자의 눈은 그 사이 얼음장 같이 차가워졌다. 꼭 한 마디씩 덧붙이던 입을 굳게 닫혀 있다.
이상한 환상. 연구원 여자의 반응. 그리고 이유 모를 불안감. 짓눌릴 것 같은 불안감.
나는 황급히 도망치듯 문에서 떨어져 나왔고.

"... 흐음."

가만히 나를 노려보며 태블릿을 끼적이는 여자를 뒤로 하고. 왼쪽 문을 향해 달렸다.

철커덩, 익....

나는 누군가에게 쫓기듯,


스토리텔러: 이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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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BYRINTH - [녹색방]


 [회상한다.]

 방을 조사해 보았다.
 
 일단 가볍게 주변을 둘러보자 이곳 또한 이전에 있던 방처럼 사방이 밀폐되어있는 공간임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 내 기준으로 왼쪽 벽과 오른쪽 벽에 문이 있었다. 두 문이 서로 마주보고 있는 것을 보아 아마도 한쪽 문을 열고 이 방에 들어온 뒤 정면에 있을 문을 열고 다음 방으로 가는 구조인 것 같았다. 나가는 방법을 찾는 것은 조금 미뤄두기로 했으니 문을 제외한 벽들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이곳의 벽은 마치 욕실 바닥마냥 타일을 붙여놓은 형태였다. 타일하나가 내 키 보다 더 크다는 걸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럭저럭 일반적인 형태라 볼 수 있을 것이다. 녹색을 띠고 있는 건 벽을 칠한 것이 아니라 어디선가 녹색의 빛을 벽에다 쏘고 있는 모양이었다. 벽에 손을 대자 콘크리트 특유의 서늘함이 느껴짐과 동시에 손이 녹색으로 물드는 것을 확인 할 수 있었다. 여기서 보이지는 않지만 아래서 빛을 비추는 모양이었다.

 그 외에 이곳에서 눈으로 살펴 볼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어쩐지 안도감이 드는 방에, 밑에서 녹색 빛을 비춰서 녹색으로 물든 벽, 그리고 문 두 개. 그것이 이곳에 있는 전부였다.
그래도 이것으로 끝내기는 뭔가 아쉬웠기에 좀 더 집중을 하고서 다시금 주변을 둘러보았다.
 
 “?”
 
 무언가 다른 곳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며 둘러본지 10분 정도 지났을 때 정말로 무언가 다른 곳을 발견했다. 유일하게 문이 없는 벽의 구석쯤에 묘하게 다른 곳에 비해서 녹색 빛이 짙은 곳이 있었다. 눈의 착각일 수도 있었지만 일단 확인해보기로 했다.
 
 “.....”
 
 가까이 다가서자 그곳이 확연히 다름을 느낄 수 있었다. 다른 곳에 비해서 그림자가 져있었다. 조심스럽게 그 근처를 매만지자 다른 곳에 비해서 조금 매끈하다는 느낌과 함께 달칵 소리가 났다.
 
 “뭐지... 이건?”
 
 벽의 일부가 빠져 나왔다. 조금 당겨보자 타일의 일부가 마치 문처럼 서서히 열렸다. 혹시라도 바깥으로 나갈 탈출구 일까 싶어서 활짝 열어보았지만 어디론가 통한 곳은 아니었다. 다만, 벽 안쪽은 마치 작은 냉장고처럼 되어있었다. 묘하게 흐트러진 느낌이 있었지만 그래도 전반적으로 꽤 많은 양의 먹을거리와 마실 거리가 있었다.

 이것들을 기뻐하며 먹기에는 나는 아직 목이 마르지도, 배가고프지도 않았다. 지금 느끼는 것은 갈증이나 허기가 아니라 참을 수 없는 오한과 초조함이었다. B박사를 포함해서 여기서 나를 지켜보고 있는 사람들이 도대체 뭘 원하는지 알 수 없었다. 이걸 찾기를 바랐나? 아니면 그냥 놓치고 넘어가는 걸 상정했을까? 아무것도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이것만 보더라도 보이는 것 이상으로 이곳에 숨겨져 있는 것들이 많은 것 같았다. 개중에는 이곳에 대한 정보가 남아있을지도 몰랐다.

 초조감에 물을 하나 꺼내 마셨다. 어쨌든 이곳에서 살펴볼만한 곳은 다 살펴본 듯싶었다.
 
(스토리텔러 - 김진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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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BYRINTH - [CHART - 실험체 1413]










스토리 텔러: 이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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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BYRINTH - [ROOT - C]


(철컹,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잠겼다. 돌아갈 수 없다.)




이젠 보기만 해도 구역질이 치미는 하얀 빛이 쏟아졌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사방은 온통 잿빛 하얀색뿐이다.

내가 검은색 문을 열었던 게 맞나? 눈앞에 펼쳐진 하얀 격벽의 파도를 보고 있자니 현기증이 이는 것 같다.

"오? 여기로 왔네."


또각  또각  또각

가까워지는 발소리. 본능적으로 몸을 움츠렸다가, 어딘가 익숙한 목소리라는 점이 떠올랐다.
방금 전에 들었던 목소리다.

"안녕, 실험체 7413."

건조한 얼굴로 손을 흔드는 여성. 눈 아플 정도로 하얀 가운을 입었고. 바이저 고글 비슷한 걸 쓰고 있어 얼굴이 정확히 보이지는 않는다.




손에는 태블릿 패드를 들고 있었다.

연신 나를 흘깃거리며 무언가 작성하고 있다. 저 시선. 마치 나를 감시하는 듯한, 그리고 내려다 보는 듯한 시선이 심히 거슬렸다.

"기분은 어때?"

그러면서도 자기 혼자 심각하게 여유로운 저 말투 역시 매우 거슬렸다. 자연히 내 심사는 비틀렸고.

"닥쳐. 출구나 말해."
"오우, 무서워라."

내 서슬퍼런 말에도 그녀는 눈 하나 깜짝않은 채 태블릿 패드에 한 줄을 추가할 뿐이다. 보나마나 나에 대한 걸 끼적이고 있겠지. 무슨 신이라도 된 마냥 나를 평가하면서.
나는 별안간, 아무 말도 없이 그녀에게 달려들었다.
주먹을 움켜쥐고,
힘껏 내지른다. 주먹이 크게 뜨인 눈앞의 여자 눈두덩에 적중했다.

아니, 적중한 줄 알았다.

"아 네."

노이즈와 함께 여자의 얼굴이 크게 흔들렸다. 흐물흐물 녹듯이 모습이 허물어졌다가, 거짓말처럼 다시 모여든다. 다시 모여든 얼굴은 웃고 있었다. 비웃는 것 같기도, 동정하는 것 같기도 한 웃음.

"이거 홀로그램 영상이야. 실험체의 심적 안정을 위해 사람 모습을 보여줄 필요가 있다고 해서. 어때, 심적 안정이 좀 생겨?"

... 기분 나쁜 년 같으니.

삐이익-

... 맑게 울리는 소리에 눈을 돌렸다. 내가 들어온 곳의 맞은 편. 반대편 문에서 나는 소리였다.

"출구 찾지?"

 문득 등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고개를 다시 돌리자 연구원 여자는 히죽 웃으며 문 쪽을 가리켰다.

"나가려면 저쪽."

나는 아니꼬운 눈빛을 한 번 쏘아내는 내게, 그녀는 슬쩍 웃으며 한 마디 덧붙였다.

"나갈 수 있으면 말이지만."

그 말을 뒤로한 채, 나는 천천히 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문고리를 잡고 힘껏 열어젖혔다. 덜컹, 끼이익... 낡은 문 특유의 금속음이 귀를 찌르길 잠시. 등 뒤에서 그년의 이죽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실험체 7413. 현시간부로 '다중 시간선 비선형 제어 관리 실험'을 시작한다. 행운이 있길."

유난히 서슬퍼렇게 들리는 그 말을 무시한 채.




스토리텔러: 이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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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BYRINTH - [루트 B]

나는 왼쪽 문을 선택했다.
 
“7413번째 실험체. 다중복합변수제어 반복상황 실험에 참여의사를 보임.”
 
손잡이에 손을 대자 낮은 톤의 남자 목소리가 들렸다. 뒤를 돌아보았지만 묘하게 인기척이 없던 남자와 여자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슬쩍 검은 색 문을 보았지만 그곳은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그리고 내 앞에 이것 또한 마찬가지였다.
 
철컥
 
거창한 소리와 함께 하얀 문이 열렸다. 잠시 문 안쪽의 기색을 보았지만, 그 안은 어둑어둑해서 정확히 무엇이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분위기를 보아 문 건너에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는 것은 검은 문 쪽도 마찬가지일 것 같아 나는 체념하고선 안으로 들어섰다.
연결통로를 조금 걷고 있자 등 뒤에서 쾅 하고 큰 소리가 났다. 뒤를 돌아보니 강철로 된 방화벽 같은 것이 문을 가로막고 있었다. 이젠 되돌아 갈 수 없다. 어느 정도 예상한 범위였지만 되돌아 갈 수 없다는 사실은 상당한 부담으로 자리 잡았다. 다시금 초조해지는 다음을 다잡고 다시 통로를 걷고 있자 머리 위에서 소리가 들렸다.
 
이곳은 @#&*박사의 관리 하에 있는 실험장 루트 B입니다. 보더 라인을 넘어 온 이후부터 실험체 7413@#&*박사의 주관 하에 놓이게 됩니다. 실험참가자 분들은 이점 다시 한 번 확인 바랍니다.”
 
상당히 기분 나쁜 말이었지만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이야기는 아닌 듯 했다. 그 발음하기 어려운 이름의 박사, 편의상 B라고 부를 그 박사가 내게 해를 끼칠 사람이 아니길 바랄 뿐이었다.
목소리가 들리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서 다시금 문이 보였다. 그리고 그 위에는 녹색으로 B라고 적힌 네온사인 같은 것이 있었다. 이곳이 B라면 검은 족은 A였던 걸까? 지금에 와선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저 나는 무엇이 튀어나오더라도 민첩하게 반응 할 수 있게 잔뜩 긴장하고 문을 여는 정도 밖에 할 수 없었다.
 
문을 열자 그곳은 녹색 빛으로 가득 차 있는 방이었다. 긴장했던 것이 무색하게 특별한 것은 아무것도 없는 왠지 모르게 편안하고 안락한 느낌의 방이었다.
 
나는 이곳에서
 
 

스토리텔러 - 김진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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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11. 6.

LABYRINTH - [갈림길]



(더이상 나아가기 두렵다. 이전으로 돌아가자)


통로의 종착점. 빛이 쏟아지던 그 곳에 있는 건…….


온갖 실험도구가 넘치는 방이었다.
도대체 어떤 실험을 하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기이한 물건들이 방 곳곳에 걸려있거나 테이블에 진열되어 있었다.

그것들 중에서 여기서 유용해보이는 것이 몇몇개 눈에 띄었다.
나는 그 물건들을 집으러 다가갔다.
텅하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그곳을 가로막던 강화유리가 존재감을 뽐냈다.

아욱, 씨발.

나는 손을 부여잡고 고통을 호소했다. 그런 나의 앞에는....

"이제서야 여기까지 왔군."

흰색 가운을 한 남자가 내 앞에 서 있었다.
인기척을 느끼지 못했기에 그에게서 묘한 이질감이 들었다.

"실험체 7413호."

뒤에서 여자목소리가 들렸다.
돌아보았다.
목소리가 멀리서 들린 것만 같았는데 바로 뒤에서 날 지켜보고 있었다.
그녀역시 인기척을 느끼지 못했다.
두 사람 다 시선이 보이지 않는 고글을 쓰고있어 그들의 표정이 보이지 않았다.
그들의 목소리는 차가웠으며 기계적인 말투였다.

"실험체라니? 무슨말을 하는거지? 여기는 어디야! 너희들이 납치해온거냐! 당장 나가는 길을 말해!"

"실험체 7413호, 선택해."

그녀는 내말을 깔끔하게 무시했다.

"대답해!"

그녀를 향해 주먹을 내질렀다. 하지만 주먹은 허공을 갈랐고 나는 이내 넘어졌다. 그 연구원은 아무 일 없었다는 양, 날 내려다 보며 다시 말했다.

"선택해.

왼편에는 흰색의 문

오른편에는 검정색의 문이 있어."

나는 분했다.
날 납치한 사람들의 말을 따라야 한다는 것이 납득가지 않았다.

"자, 선택해."

하지만 이곳에서 나가야 하기에,
그녀의 말에 따라 어쩔 수없이 선택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야 한다고 느꼈다.

그래서 나는...


           




스토리텔러: 이웅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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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BYRINTH - [심연 속으로]






(나아가기가 두렵다 되돌아가자)





우리가 심연을 들여다볼 때, 심연도 우리를 들여다 본다. – 프리드리히 니체.

“이건 또 뭐야….”


문을 열고 들어서니 나를 반기는 것은 길게 이어진 통로였다. 하얀 아치형 벽면은 어둠에 잠겨 있었고. 반대편에서 새어 나오는 빛과 껌뻑거리는 전등만이 간간이 통로 내부를 비추고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어…!”


스륵, 하고 무언가가 통로 너머에 그림자를 비쳤다. 똑똑히 봤다.


나는 너무 놀란 나머지 그 자리에 망부석처럼 서 있었다. 하얀 면이 되어 밝게 빛나는 저편. 무언가의 실루엣이 가만히 서 있었다. 어렴풋이 보였다. 사람? 사람일지도 모른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행여나 눈을 떼면 신기루처럼 사라질세라, 나는 눈 깜빡이는 것조차 조심스러워졌다.





“… 사람.”


나는 거의 달리다시피 통로를 가로질렀다. 철벅, 처벅. 맨발의 차가운 감촉과 길게 울리는 발소리. 그리고 요동치는 심장 소리를 반주 삼아, 나는 목청을 높였다.




“여기야. 여기!”


두 손을 흔들어대며 나는 달렸다. 광량이 눈에 띄게 늘어났다. 실루엣이 점차 선명해져 갔다. 그것은 꼭 사람의 크기를 하고 있었다. 나는 벅찬 마음에 속도를 더 높였고, 이내 통로를 완전히 빠져 나왔다.


“…… 어.”



그리고 얼이 빠지고 말았다.






스토리텔러: 이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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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BYRINTH- [비웃음]


(문이 잠겼다 돌아갈 수 없다.)

“… 뭐지?”

문을 열고 들어오자, 아까와 같은 조그마한 각방이 나를 반겼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플라스크나 비커, 그 외 연구용품으로 보이는 알 수 없는 물건들이 곳곳에 흩어져 있다는 정도이다. 종이 쪼가리들이 자잘하게 널려있다. 얼핏 지나가는 눈으로 보자, 연구니 보고니 하는 단어가 눈에 띄었다.

나는 비척거리는 발걸음을 옮겨, 대충 그 중에 하나를 집어 올렸다. 하고 많은 문서 중에 그것을 고른 건 큰 이유가 아니었다. 유난히 눈에 띄는 커다란 그림 때문이었다.

“이건…….”

그림을 눈에 담는 순간. 나는 퍼뜩 숨을 삼켰다.




나는 이 그림을, 알고 있었다.


“큭….”

머리가 지끈거리며 아려온다. 우로보로스. 연금술사의 뱀. 세상의 근원. 무한의 존재. 이 지식은 뭐지? 내 원래 기억? 그렇다기엔 이질감이 심각했다. 마치 억지로 주입 받은 듯한. 그런데도 너무나 익숙한.

“…… 후.”



나는 한숨과 함께 머리를 털어냈다. 지금 중요한 건 이런 그림 나부랭이가 아니니까. 나는 사방을 둘러보다가 눈살을 바짝 찌푸렸다.

“또 문이냐?”

말마따나 방 맞은편에는 문이 있었다. 붉은 문과 초록색 문. 내가 들어온 노란색만 없어졌다지, 결국 똑 같은 선택지였다.

어차피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등줄기를 스멀스멀 기어다니는 감각. 지릿거리는 신체 말단. 아우성치는 듯한 머릿속. 정신은 열화하는 듯했고, 눈앞은 불투명한 가운데. 유난히 날 선 하나의 문장만이 온 감각을 지배하고 있었다.

나는, 앞으로 나가야만 한다.

“… 그럼.”


나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눈 앞에 덩그러니 붙어있는 문을 열고, 앞으로 나아갔다. 차박, 차박. 발소리가 유난히 서늘하게 다가왔다. 이 하얀 방이 나를 비웃는 소리처럼 느껴진 나머지, 나는 쫓기듯 문 앞으로 다가갔다.

내가 잡은 문고리의 색상은.

        






스토리텔러 – 이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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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BYRINTH - [파열]


(문이 잠겨있다. 되돌아 갈 수 없다)

고오오오, 하는 공기의 낮은 울음소리가 가장 먼저 들려왔다. 나는 천천히 붉은 문 너머로 발을 들여놨다.

피처럼 붉은 문을 지나자 그 안에는 아무것도 없는 공동이 있었다. 나름 긴장을 했던 내가 한심스러워질 정도로 썰렁했고, 나름 기대를 했던 내가 표정을 굳힐 정도로 황량했다.

“… 아까랑 같은 곳?”

나는 중얼거렸다. 그렇게 말할 수 밖에 없을 만큼 분위기가 닮아 있었다. 웃어야 할까 울어야 할까.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하나는 확실했다. 나는 재빨리 입을 틀어막았다.

“우욱!”

같은 공간. 붉은 문. 그리고 그 너머의 같은 공간. 그리고, 깨질 것 같은 머리.

왜일까. 고작 그것뿐인데, 참을 수 없을 만큼 역겨웠다. 머리가 어지럽다. 온몸이 쑤시는 듯한 불쾌감이 엄습해왔다.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기억의 편린들이, 마치 와장창 부서진 유리조각처럼. 날카롭게 뇌 속을 쑤셔대는 것 같았다.

“살려, 나가… 여기서…!”

나가야 한다. 지금 여기서. 살고 싶으면. 당장.

누군가 그렇게 외쳐대는 것 같았다. 척수를 타고 신체 말단까지 흐르는 모든 사고의 흐름이 생생히 느껴진다. 발을 움직이고, 손을 허우적거렸다. 그리고 그 순간.





"뭐?"

줄곧 같은 말을 내뱉기 시작하는 천장이 말해줬다. 내 빌어먹을 직감이 적중했음을.

용암줄기와도 같은, 화염의 폭포가 천장에서 쏟아지기 시작했다. 앗 하는 사이였다. 화염은 내 온몸을 덮어썼다. 마구잡이로 소용돌이치던 사념들이 일순 하나로 통일되었다.

뜨겁다. 너무나 뜨겁다!

“으아아아악!”

경고, 폐기… 실험체… 무미건조한 천상의 목소리가, 불타오르는 고막을 울린다. 정신이 모두 불타듯이 점점 사그라든다. 아득해진다. 고막이 다 타버렸는지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암전된다.

내가 남아있는지, 불꽃이 됐는지, 그것도 아니면 하얀 방이 되어버렸는지. 아무것도 모르게 되었을 때 즈음.

"... 아."

문득 새하얀 빛이 쏟아진다. 나는 거부하지 않았다.


스토리텔러: 이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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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BYRINTH - [하얀 방]




눈앞이 새하얗게 물들어 있었다.

이곳이 어딘지 떠올리기 이전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다는 공포에 눈가를 마구 부비적거렸다.

그렇지만 눈을 비비고 몇 번이고 눈을 깜빡여도 여전히 보이는 것은 새하얀 것 밖에 없었다.


“아아아.....”

뭐가 뭔지 아무것도 모르겠는데,
오로지 새하얗고 새하얘서,
뭔가 보이는 것은 없는지,
이곳이 어딘지 알 수 있는 것은 없는지 주변을 두리번거렸지만,

그런데도 여전히 새하얘서 시야 뿐 아니라 머릿속까지 하얗게 물들어가서 초조감에 뭐라도 떠올려보려고 했지만 그런데도 머릿속은 하얗고 떠오르지 않고 나는 누구인지 여기는 어디인지 왜 내가 여기에 있는지 사고 자체는 정상적인데도 뭔가 떠올리는 것은 제한당해 있고 그런데도 사고를 할 수 있는 기반이 그대로 있다는 사실에 위화감과 헛구역질을 느끼면서.
뭐가 뭔지,
무엇이 무엇인지,
아무것도 알 수 없는데,
그런데도 눈앞은 여전히 새하얘서

"으







악!"

정신을 차리니 나는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몸을 웅크려서 두려움인지 분노인지 아니면 아직도 머릿속에 남아있는 하얀색인지 모를 것을

토하고,

             토하고,

토하며 손을 내려치고 주먹으로 얼굴을 가격하고
그러면서 느껴지는 고통에 내가 살아 있음을 깨닫지만
그런데도 눈앞은 여전히 새하얘서 쓸모없는 눈동자를 뽑아버리기 위해서 손을 들었을 때,
처음으로 흰 것이 아닌 것을 인식 할 수 있었다.


눈앞에 내 손이 보였다. 
보이지 않는 게 아니었다. 
그저 지금 있는 장소가 굉장히 새하얄 뿐이었다. 
기분이 나쁘긴 하지만 새하얀 것만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닫자
웅크린 곳에서 그림자도 보였다. 
위를 올려다보자 유독 흰 곳에서는 빛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곳은 새하얀 방이었다.




나름 안정을 되찾고 나서 주변을 두리번거릴 때
처음으로 이질적인 소리가 들렸다. 
기계음이란 것은 알았지만 기계가 어떤 것인지에 대한 기억은 전혀 없었다. 
떠올리면서 모른다는 괴리감에 다시금 뭔지 모를 감정과 구역질이 치밀어 올랐지만 무시하고서 소리가 들리는 쪽을 보았다.

그곳에는 세 개의 문이 있었다. 

디자인은 전부 동일하고 일정한 간격으로 늘어서 있었지만, 이곳에서 유일하게 색을 지니고 있었다.

붉은색,
노란색,
초록색. 

세 가지 색으로 페인트 칠 된 문은 아무런 안내나 설명 없이 그 자리에 늘어서 있었다.


나는...





             



스토리텔러: 김진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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